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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날들 - 다산 잠언 콘서트
내가 살아온 날들 - 다산 잠언 콘서트
  • 저자정약용
  • 출판사스타북스
  • 출판일2014-04-03
  • 등록일2014-05-27
보유 3,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0, 누적예약 0

책소개

백성이 근본인 나라를 꿈꾼 정약용이 겪은 시련들
정약용이 개혁적 면모를 보이지 않고 그저 그 시대의 관료들이 받아들인 의미대로 분위기에 따라 입 조심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을 하였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유배를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신과 일가만 보전하기 위해 명철보신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군주(나라)도 함께 보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부조리에 눈 감지 못하고 부조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진정한 학자이고 관료였다. 
정조는 개혁적 사고를 갖고 있었고 조정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에 정약용을 신임하고 중용하였다. 정조 대를 전후하여 서학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으나 정조는 유교가 올바르게 진흥되면 사교는 힘을 못 쓸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기에 적극적인 탄압은 하지 않았다. 
정조가 자신의 뜻을 펼치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개선할 듯하였으나 정조가 붕어하고 노론이 득세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노론은 반대파인 남인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빌미로 신유박해를 일으켜 사람을 죽이고 가두고 귀양을 보냈다. 정약용 또한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받고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정약용이 구하던 사상은 자신들의 권력만 틀어쥐려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8년 유배 기간의 고통을 승화시키다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정약용은 끝을 알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쳤지만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정약용은 시련의 시간을 자신이 관리로 있을 때부터 추구하고 탐구하던 사상을 실현시킬 기회로 삼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제자를 길렀다. 
정약용은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어야 하고 그 이익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을 구가하고 부국강병이라는 현실 정치에 대한 해법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의 사상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었다. 타락한 제도와 부패한 벼슬아치로 인해 백성들이 큰 고통에 시달리고 반상의 구별이 당연한 시대에 정약용은 백성이 근본인 세상을 꿈꾸었다. 
정약용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폐습이 단번에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급격한 체제 변화 없이도 바로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관료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지 않고 관료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더라도 백성이 수탈당하고 핍박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목민관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백성의 삶을 자신의 일처럼 느꼈던 정약용은 사대부가의 학자이자 관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나라의 부패를 없애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뼈저린 고뇌를 거듭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약용의 근본적이고 실용적인 학문ㆍ정치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정약용의 비판 정신이 민중의 아픔을 나의 일로 느끼며 고뇌한 과정 속에서 개혁적 사고로 연결되고 실제적인 사상의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를 꿈꾼 정약용의 실학 정신은 오늘날 사회 개혁의 방향과 국가의 정책과 역할을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큰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여전히 든든한 좌표로써 존재한다.

저자소개

선생의 자(字)는 미용(美鏞) 또는 송보(頌甫)요, 약용(若鏞)은 그의 이름이고, 다산(茶山)은 호며, 본관은 나주(羅州)다. 1762년(영조 38) 6월에 경기도 광주(廣州) 초부면(草阜面) 마현(馬峴)에서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그곳에서 별세했으니 향년 75세였다.

 1783년(정조 7)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89년에는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검열(檢閱)이 되어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진귀한 서적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어 그의 학문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서학(西學)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그해 12월에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참지(兵曹參知),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1797년에 다시 들어와 형조참의로 승진했다.

 그러나 1801년, 즉 순조 원년에 소위 신유교난(辛酉敎難)이라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났다. 다산의 두 형 약전(若銓)ㆍ약종(若鍾)이 함께 체포되었는데, 셋째 형 약종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둘째 형 약전과 다산은 유배되었다. 둘째 형 약전은 전남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가 흑산도로 옮겨졌으며, 다산은 경상도 장기(長耆)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강진으로 옮겨졌다.

 다산은 강진에서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이란 긴 세월을 귀양살게 되었는데, 거기에 있는 윤박(尹博)의 정자인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책을 쓰고 제생(諸生)을 가르쳐 즐거움을 삼았다. 그의 호 다산(茶山)은 여기서 지어진 것이며 그의 많은 저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실로 불행한 시기였으나, 그로 하여금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한 소중한 기간이기도 했다.